.•♥ 타로, 점, 사주 등에 의지하는 삶에 대한 영적인 해석 - 주체적인 삶이 중요한 이유
타로, 점, 사주 등을 많이 보는 것이 어떤 종교 단체에서는 죄가 된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시 사후에 문제가 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저의 견해를 적어보고자 합니다.
우선 저는 인간이 만든 종교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뿐더러,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종교는 교리와 신념 체계를 강조하면서 그 범위 안에서만 사고하도록 유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영혼이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내면적 탐구를 바탕으로 더 넓은 시각에서 영성을 이해하고 성장을 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의식을 어떠한 규율이나 일정한 틀 안에 제한시키는 것은 영적성장에 제약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연구한 바로는 영계에서는 선악이나 죄의 개념이 기성종교에서처럼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단순하게 구분하지는 않습니다.
어떠한 행위를 단순히 죄의 유무로 판단하기보다, 영적인 차원에서는 행위의 동기나 의도, 주변에 미치는 영향, 자신의 영적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등 종합적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영계에서 사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때 유의미하게 보는 부분 중에 하나는, ‘자신의 삶을 영혼이 얼마나 주체적으로 잘 살았는가’입니다.
영계에서는 단순히 ‘어떤 경험을 했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어떤 태도로 마주했는가’를 더 중요하게 본다고 합니다.
에고에 끌려 다니면서 물질적인 삶에 너무 치우치거나, 남들 따라 산다거나,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남들 눈치 보면서 사는 것들을 별로 좋게 보지는 않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생각해보면, 영혼이 삶을 이끌어가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사는 것은 영적으로 별로 좋지 않다는 뜻인데요.
사람이 살다보면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고 사는 게 힘들다보면 여러 가지 미신들을 믿기도 하고 점, 타로, 사주 등을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곳에 너무 집착을 한다거나 그런 곳에서 하는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고 살게 되면, 이것 역시 수동적인 삶이 되는 것이며, 영혼이 주체가 되어 삶을 이끌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수동적으로 산다는 것은 '자유의지'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전체적인 삶을 계획하기 때문에, 인생의 큰 틀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것은 맞지만, 그 틀 안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생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영혼은 체험을 하면서 여러 가지 상황에서 스스로 선택을 하면서 삶을 창조해나가게 되는데요.
임사체험자들은 이 부분을 보고 선택을 할 때마다 평행우주가 계속 바뀐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만약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아무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 영혼은 교훈과 깨달음을 얻으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반성도 전혀 안하고 교훈을 얻지도 못하고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을 하는 것이 문제이지, 실수를 하더라도 배우고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 실수는 영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글을 쓰면서 영적성장에 있어서 ‘자유의지’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언급을 하는데요.
위에서 설명한 대로 결과가 어떻든 스스로 선택을 해나가면서 체험을 해 나가야지만, 자신의 영혼이 결과에 대해 느끼는 점들도 많고 책임감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점이나 사주를 보고 거기서 말한대로 어떠한 선택을 했다가 일이 잘못되거나 피해를 보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탓하기보다 점이나 사주를 잘못 봐준 사람들만 탓하고 원망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영혼은 남을 미워하면서 책임을 그 사람에게 떠넘기게 되고, 자신의 판단력을 보완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들도 영혼의 성장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도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요.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후회, 미련, 집착이 많으면 감정적인 에너지가 무거워서 사후에 고차원으로 빠르게 올라가지 못할 수도 있기도 하고, 같은 감정을 해소하거나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울 때까지 윤회가 좀 더 길어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결과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영혼은 사후에도 의식이 타인의 신념이나 특정한 차원에 얽매이지 않게 되어 좀 더 자유로운 상태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것은 높은 수준의 자아 인식과 정신적인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이므로, 영적성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영성에서 ‘수용’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도 이런 부분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어떤 사람이 점이나 사주를 보고난 후, 자신은 운도 별로 따라주지도 않고 성공할 사주도 아니고 별 볼일 없는 사주라고 해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포기한 채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영혼은 노력으로 주변 환경을 바꾸거나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작은 가능성마저도 스스로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점이 나쁘게 나왔다고 해서 스스로 불행한 운명을 받아들인다면,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쌓이다보면 실제 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그와 상응하는 결과를 끌어당길 수가 있어서,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모르는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노력해도 안될거라는 체념을 할 수도 있겠죠.
임사체험자들은 가끔 자신의 미래 모습을 보기도 하는데, 동시에 자신이 몸으로 돌아가면 그 미래의 모습이 기억에서 지워질꺼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걸 알게 되면 자신이 리얼하게 체험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기억이 지워진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재의 상황에 충실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고,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상관없이 그 결과를 수용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영혼이 배우고 성장하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계에서는 자신의 처지나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이 어떻게 내면의 힘으로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 창조했는지를 매우 중요하게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체험자’가 아니라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는지가 삶을 평가할 때 중요한 지표가 된다고 합니다.
영혼퇴행이나 임사체험이나 종교나 철학에서도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으며 진리를 탐구해 나가야 한다는 말이 가끔 언급이 되고 있는데요.
자신의 내면적 소명을 따라 자신이 진정 원하는 길을 가는 것이 곧 영혼의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을 외부 환경과 운명에 의해 이끌려 가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처한 환경, 타인의 기대, 사회적 구조에 따라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요.
체험 자체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성장과 깨달음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겠죠.
영혼은 본래 창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식과 의도를 통해 의식적인 선택과 능동적인 창조를 함으로써 더 깊은 자각과 성장이 이루어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혼은 한 생에서 크게 성장하기 위해 어려운 환경을 스스로 선택하기도 하고 장애인으로 태어나기도 하는데요.
영혼이 어려운 환경을 계획하고 태어났다면, 그 사람의 사주는 풍파도 많이 겪고 매우 어렵고 힘들게 살아간다고 나올 수도 있을 겁니다.
그 영혼은 그러한 역경을 이겨내면서 성장을 하려고 일부러 그런 환경을 계획한 것일 줄도 모르고, 사주만 믿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우울하거나 방탕한 삶을 살아간다면, 그 영혼은 스스로 자유의지에 의해 운명을 개척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며, 태어나기전의 계획도 전혀 실현하지 못하고 실패한 삶을 자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건 마치 사지 멀쩡한 사람이 자신이 장애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한계를 긋는 것과 같다고도 볼 수 있겠죠.
장애인들도 엄청난 노력에 의해 어떤 분야에서는 일반인들보다 더 월등히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기도 하고, 누구보다도 긍정적이고 밝은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한 힘든 삶을 계획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혼은 힘든 환경에서도 꿋꿋이 긍정적인 빛을 잃지 않고 삶을 자신의 의지로 개척해 나가면서 신성이 확장되고 큰 성장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사주는 어떻게 보면 영혼이 선택한 삶의 운명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지도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반드시 정해진 길이라기보다는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났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틀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주는 영혼이 설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조건 중 하나로 작용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주의 흐름대로 사는 것보다, 사주의 틀 안에서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삶을 창조해 나갈 때, 더 높은 깨달음과 성숙함을 이루어 나갈 수 있으며, 그것을 하나의 도구로 삼아 더 깊은 자각과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때 영혼은 더욱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유의지에 대한 글을 쓰면서 어떠한 순간에도 절대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글을 적은 적이 있는데요.
운명은 노력으로 충분히 바꿀 수 있고, 바꿀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정해진 운명 속에서도 마음먹기에 따라 더 행복하고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설령 엄청나게 노력을 했음에도 실패한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절대 그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라, 죽고 나면 영계에서도 높게 평가받게 되고 자신의 영혼에게는 소중한 경험이고 중요한 자산이 됩니다.
점, 타로, 사주 같은 것들을 많이 보러 다녔다는 것이 사후에 문제가 된다기보다,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되면 자신의 영혼이 성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부분이 가장 문제가 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사후에 인생회고를 할 때 영적가이드들도 그런 부분들에 대해 조언을 해주겠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후회를 하게 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죠.
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걸 보면서 너무 창의적이지 못하고 기계처럼 산다는 느낌을 많이 받게 되는데요.
사회에 적응하려면 어느 정도 사회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주입식 교육방식들도 그렇고 정해진 코스대로 살면서 너무 개성도 없고 일률적으로 살아간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잘산다’라는 기준을 정해놓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인생의 낙오자나 패배자가 되어버리는 이상한 풍토 같은 것이 있는데요.
제가 좀 답답해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특히 한국사회가 좀 심한 것 같습니다.
부모나 주변사람들도 영성을 모르다보니 성공하려면 남들이 하는 것들을 똑같이 해야 하고, 본인 스스로도 그들을 따라가지 못하면 불안해하거나 우울해하기도 합니다.
좋은 학교나 좋은 직장 다니지 않아도 상관없고, 돈 좀 못 벌고 허름한 집에 살아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물질계에 잠깐 살다 가는 것인데 아무 의미 없는 것들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경쟁만 하면서 남들 눈치만 보다가, ‘자아실현’을 통한 영적성장도 못하고 죽게 되는데요.
창의적이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른다는 게 사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죠.
인간으로 살아갈 때는 문화나 관습에 의해 형성된 에고가 작용하기도 하지만 삶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가 좁다보니 잘 느낄 수가 없지만, 사후에 영계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면 너무 정해진 대로 살 필요가 없었는데, 왜 저렇게 살았는지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점, 타로, 사주 같은 것들은 가끔 힘들 때 마음의 위로가 되어주기도 하고 화를 피해가도록 도와주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거기에 너무 집착을 한다거나 그것만 너무 믿고 자신이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영적으로 별로 좋지 못하기 때문에, 도구 정도로만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통찰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참고자료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노자의 명언을 하나 소개한바 있는데요.
“자아와 영혼은 환상을 자아낸다.
인간의 가장 큰 환상은 현실이 환상이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환상을 창조하는 자는 현실보다도 더한 현실을 창조할 것이고,
영혼의 길을 따라 우주의 길 또한 찾아낼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환상은 현실이 환상이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라는 부분은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믿음에 의해 형성되고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환상을 창조하는 자는 현실보다도 더한 현실을 창조할 것이다“라는 부분은 우리의 상상력과 창의성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혼의 길을 따라 우주의 길 또한 찾아낼 것이다"라는 부분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실제로는 더 깊은 진리를 숨기고 있다는 것으로, 현실이라는 겉모습을 보지 말고 내적인 탐구와 영혼의 길을 따르는 것이 더 높은 진리와 우주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자의 말의 핵심은 자신의 의지대로 창조적인 삶을 사는 것이 영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이는 때로는 물리적 현실보다 더 강렬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제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수동적인 삶보다 자신의 영혼이 삶의 주체가 되어, 단순히 ‘체험자’가 아니라 ‘창조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노자도 역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해 자신은 ‘창조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긴 글 읽어주신 모든 영혼들에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