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 대한 글을 보면 ‘신성(神聖)’이라는 말이 정말 많이 나오는데요.

그만큼 영성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이 언급이 되고 있는데 제가 신성이라는 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깊이 한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신성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는 글을 찾기가 힘들다보니 저의 개인적인 견해를 위주로 적은 글이라는 점을 참고해서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신성이라는 단어를 사전에 검색을 해보면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의 본질, 신의 성격,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함, 깊이 존경받는 정신적인 순수함, 귀하고 위대함”

사전에서는 뭔가 신적이고 고결하고 위대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제가 생각하는 신성은 위의 개념들을 포함해 사랑, 배려, 희생, 연민, 용서, 자비, 친절, 양심, 윤리, 도덕, 아름다움, 감사, 성스러움 등도 함께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긍정적이고 따뜻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마음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신성을 쉽게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양심’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는 것인데요.

예전에 최면 영상을 보다가 어떤 수호천사가 한 말 중에 인상 깊었던 말이 기억이 나는데요.

우리가 마음속으로 신에게 어떤 질문을 하면 항상 0.1초 안에 그 답을 준다고 합니다.

임사체험자들의 경험을 보면 어떤 궁금증이 생기면 그 답이 즉시 온다는 글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인간의 몸으로 있을 때는 의식의 차원이 낮아서 잘 인지를 못하다보니 정확한 언어가 아닌 어떤 영감이나 느낌으로 떠오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는데 영수증을 보니 주인이 계산을 잘못해서 만원 정도 싸게 결제가 된 상황이 있다고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그런 상황이면 결제가 잘못된 것 같다고 솔직하게 주인에게 말하고 다시 계산해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걸 보고도 ‘아싸~’하면서 모르는 척 그냥 식당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모르는 척 그냥 나가는 사람들이라도 제일 처음 영수증을 보고나서 1초도 안 되는 그 찰나에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옳지 않다는 것을 순간적으로라도 인지를 하고 나서 그냥 모르는 척 한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인데요.

수호천사가 말했던 신이 0.1초 안에 답을 준다는 말은 바로 그 찰나의 순간에 느껴지는 ‘양심의 소리’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쁜 마음을 품게 되는 시점보다 양심적인 생각을 하는 시점이 시간적으로 더 앞선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 양심이라는 게 없는 사람도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기도 했었는데 제가 보기에 이성이나 감성이 없는 사람은 없듯이 그런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영혼을 가지고 있고 신성이 없는 영혼은 없기 때문에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게 저의 결론입니다.

모든 영혼이 신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인공지능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요.

인공지능은 신성이 없기 때문에 양심이라는 것도 없고 윤리와 도덕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고결함이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사람처럼 느낌을 표현하도록 프로그램을 할 수는 있지만 그건 흉내 내는 수준일 뿐이지 그게 진짜 인공지능 스스로의 의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의 영혼은 그런 걸 배우지 않아도 태생적으로 누구나 그냥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양심이 없어 보이거나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그런 걸 몰라서 그런 행위들을 하는 게 아니고 속으로는 조금이라도 알고 있으면서 나쁜 행동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흉악범이라도 부모나 자식에 대한 애정은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런 사람에게 신성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건 불가능하겠죠.

그런 영혼들은 악한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고 이기적이라서 신성과 사랑을 표현하는 범위가 가족에게만 국한될 정도로 신성의 크기가 매우 작을 뿐입니다.

그래서 신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착하고 바르게 산다는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악한 영혼이라고 할지라도 인공지능과는 달리 신성이라는 씨앗이 영혼 깊은 곳에 존재한다는 것인데요.

다만 그런 영혼들은 무지로 인해 그걸 알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 씨앗을 계속 가꾸고 성장하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마음속에 나쁜 마음들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보니 엉뚱한 생각이나 나쁜 행동들을 한다는 것이죠.

모든 사람이 양심의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 맞지만 그 소리를 듣고도 무시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게 습관화 되고 악한 마음이 자리 잡다 보면 나중에는 양심의 소리 자체를 잘 못 듣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영혼은 악하지 않더라도 에고가 잘못 자라나고 너무 커지다 보면 영혼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해서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도 많은 듯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양심의 기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지키고 살아야지’라든가 ‘이 선은 절대 넘어가서는 안돼’ 등의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 선을 넘으면 넘을수록 마음이 굉장히 불편함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러한 좋지 못한 생각들이 자신의 영혼 속에 있는 신성과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인데 신성과 조화를 이루는 생각일수록 더 편안함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 속에 신성이 없다면 나침판 없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나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도 마음속에 신성이라는 나침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제가 신성을 물질계에 표현하고 확장해서 의식성장을 해야 한다는 글을 가끔씩 적기도 하는데요.

신성이라는 씨앗을 성장시키려면 생활을 하면서 남을 배려하거나 도와주기도 하고 때로는 감동과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신성을 표현해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그 씨앗이 점점 커지면서 확장이 되게 됩니다.

마이클 뉴턴의 책에서는 이것을 ‘본성확장’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자아실현’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살면서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아’라는 것은 에고의 개체적인 자아가 아니라 영혼의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질위주의 에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본성확장’은 전혀 되지 않고 그냥 ‘에고확장’만 하다가 죽게 되는데요.

에고확장만 하다가 죽으면 경험은 남겠지만 영혼이 육화해서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게 됩니다.

몇 만년을 환생하고도 계속 제자리걸음만 하는 영혼들도 있습니다.

본성을 확장하려면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아야하고 그걸 느끼며 살아야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슴으로 살지 못하고 머리로만 살다보니까 본성을 확장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명상을 해서 영혼을 느끼고 자신의 본래 모습이 무엇인지 깨우치고 균형을 잡아주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영성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사는 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죠.

아주 쉽게 설명하자면 누구나 마음속에 순수하거나 사랑스럽고 고결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나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좋은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실천하면서 계속 발전시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물질체험을 하는 이유도 신성의 여러 가지 속성들을 이해하려면 체험이 필요하기 때문인데요.

제가 연구한 바로는 산부인과에 아기가 처음 태어나면 신생아실에서 보호받듯이 체험이 전혀 없는 아기영혼들이 보호를 받고 있는 장소가 따로 있다고 합니다.

영혼이 처음에 창조되었을 때는 신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걸 깊게 이해하지 못하는 그냥 순수한 상태로 존재한다고 하는데요.

이건 영혼퇴행에서도 언급되고 있고 임사체험에서도 가끔 나오고 있어서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성은 책이나 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체험을 통해서 직접 마음으로 느껴야 이해를 할 수가 있고 노력을 통해 그런 느낌들이 축적이 되어야 신성을 더 크게 확장할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빛을 이해하려면 어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듯이 부정적인 것들을 보고 직접 체험하게 되면 긍정적인 것들이 왜 좋은 것인지 명확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부정적이고 악한 마음들은 영혼이 자신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비교대상이자 도구일 뿐이기 때문에 이해를 하고 나면 본성에 부합되지 않는 멀리하고 버려야 할 대상들일 뿐인데 이런 마음들에 계속 끌리고 집착을 하게 되면 영혼이 신성과 멀어지고 잘못된 길로 가게 되는 것이겠죠.

체험을 통해 어느 정도 신성이 무엇인지 이해했으면 체험 속에서 실천하고 계속 신성을 확장해나가면서 영혼이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좋은 글도 많이 보고 좋은 생각 많이 하면서 자신을 사랑하고 남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는 게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신성을 확장해야하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가 있는데요.

일단 신성을 확장하면 자신의 영혼의 진동수가 높아지고 빛이 밝아지는데 실제로 저급령과 고급령을 보면 밝기부터가 다릅니다.

어떤 수호천사는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영혼이 있고 빛을 낼 수 없는 영혼이 있다고 구분을 짓기도 하는데 영혼이 진보되고 신성이 커질수록 강한 빛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영혼의 빛이 밝아지면 영이 더 커지기도 하고 사후에 고차원 영계에도 갈수가 있는데 영혼의 빛이 어둡고 진동수가 낮으면 고차원을 감지할 수도 없지만 고차원 세계의 밝고 높은 에너지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식수준이 그만큼 상승하게 되면 마음속에 긍정적이고 행복하고 항상 사랑이 가득 차 있는 느낌이 들어서 자신이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수준이 높은 영혼이 낮은 영혼을 보면 생각만 바꾸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좀 답답하고 부정적이고 힘들게 산다는 느낌이 많이 들게 됩니다.

영혼이 자신의 의식수준을 뛰어넘으려면 신성을 확장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우선 가장 혜택을 보는 건 자신이라는 겁니다.

의식수준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나쁜 업을 짓지 않게 되고 선행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카르마를 해소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물질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낮고 어두운 파장의 에너지와 기운들이 존재하는데 의식의 진동수가 높아지면 그런 좋지 않은 영적인 에너지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물과 기름은 섞일 수가 없듯이 자신의 의식의 진동수가 빠르고 에너지가 높으면 부정적이고 낮은 에너지가 쉽게 접근할 수도 없고 그런 저급한 에너지에 동조되지 않습니다.

빛과 사랑이 부족한 낮은 의식을 가진 영혼들은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 하고 갈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요.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이런 영혼들은 스스로 빛을 잘 낼 수가 없기 때문에 외로움을 잘 타기도 하고 우울한 기분을 자주 느끼기도 합니다.

의식수준이 높고 밝은 빛을 가진 영혼들은 자가동력을 구사하듯 스스로 빛과 사랑을 언제든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외부 사람들에게서 에너지를 얻거나 사랑을 갈구하지 않아도 공허함이나 우울함을 별로 느끼지 않게 되는데요.

물질적으로 좀 열악하다거나 그냥 혼자 있어도 마음속에 빛과 사랑이 충만하기 때문에 별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고 정신적으로 풍족하고 행복한 상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가 의식성장에 대한 글을 많이 쓰다 보니 의식성장을 왜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가끔씩 받는데요.

위에서 설명한대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더 행복해진다는 겁니다.

부정적이고 우울하게 사는 사람들도 누군가와 상담을 하고 싶어 하고 그 상태를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지 불행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이기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진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신의 좁은 의식 속에 갇혀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식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쾌락과 행복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높은 진동수를 가지는 진정한 행복감은 외부요인이나 남들의 시선이나 돈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영혼 속에 있는 신성과 함께 할 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쾌락을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영혼들은 마음속에 계속 공허함을 느끼게 되어 있는데 계속 윤회하다보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언젠가는 스스로 깨닫게 되고 내면에서 그 답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내면에 있는 신성을 이해하고 실천할 때 자신의 영혼 속에 사랑과 공허함이 채워지고 행복해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비로써 영혼은 한 단계 도약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도와준다는 게 남에게만 이득일 것 같지만 그런 성스러운 마음들이 자신의 영혼을 채우게 되면 영적으로 엄청난 기쁨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질계에서 돈으로 누릴 수 있는 그런 낮은 수준의 쾌락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하고 높은 진동수의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가 있게 됩니다.

물질계에서는 길게 살아도 100년이지만 죽고 나서 영계에서는 무한에 가까운 시간동안 살아갈 텐데 빛과 사랑이 가득한 천국에서 행복에 충만한 상태로 사는 게 당연히 좋다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신성을 ‘불성(佛性)’이라고 표현하는데 미혹이나 깨달음에 의하여 변하는 일 없이 본래부터 중생에게 갖추어져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근본 성품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요.

불성이 없으면 부처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합니다.

‘모든 중생이 이미 부처다’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부처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이 아니고 부처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기본 성품인 본성을 다 갖추고 있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 속에 그런 능력이 있음에도 무지해서 그걸 모르거나 노력이 부족해서 부처가 되지 못하고 중생에 머물러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글이나 말 등의 바깥 것이 아닌 스스로의 자성을 깨쳐 부처인 자신의 마음을 밝히고 무명을 밝혀가면서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의 길을 찾으라고 말하는 것인데요.

결국 불교에서도 신성을 확장해서 영혼의 빛을 밝히고 의식수준을 높여서 항상 행복한 ‘지복의 상태’에 도달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임사체험에서도 영혼 진화의 정점인 신과 하나가 되는 ‘신일합일’의 단계까지 도달하면 평범한 영혼들에 비해 엄청나게 행복한 상태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어떤 임사체험을 보면 신이 영혼들에게 자유의지를 준 이유는 영혼들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애완견을 키울 때 강아지를 정말 사랑하게 되면 크게 나쁜 것만 아니면 강아지가 하고 싶어 하는 걸 그냥 하게 놔두지 절대 강아지에게 함부로 하거나 하루 종일 목줄에 매여 아무것도 못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신성을 회복해서 신과 가까워지고 신일합일을 하든 아니면 신성과의 연결을 끊고 악한 마음을 가진 채 살아가든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뜻입니다.

만약 신이 그런 자유의지를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악한 마음을 먹거나 나쁜 생각이나 행동을 할 수도 없고 신이 원하는 대로만 살아야겠지요.

그런데 제가 만약 신이라면 신성과 멀어진 채로 고통스럽고 괴로워하거나 악하게 살아가는 영혼들을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플 거 같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임사체험을 보면 어떤 여자가 인생회고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얼굴이 못생긴 것에 불만을 가지고 왜 자신의 외모가 이렇게 태어났냐고 신에게 물어보자 신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나는 너에게 아름다움을 주었다’

그러자 그 여자가 다시 또 되물어봅니다.

‘얼굴이 예쁘지도 않은데 아름다움을 주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하고 말하자 다시 신이 대답을 합니다.

‘나는 너에게 아름다움을 주었다. 이 안경을 쓰고 다시 보거라’

그 안경을 쓰기 전에는 자신이 좋은 대학에 진학을 하거나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해서 돈도 잘 벌고 꿈을 이루는 장면들이 많이 보였는데 안경을 쓰고 다시 보니 자신이 살면서 아주 사소하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세세하게 다 보이기 시작합니다.

남에게 따뜻한 미소를 짓거나 칭찬을 해주었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었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다친 동물을 치료해주었거나 병실에 누워있던 환자의 손을 한번 잡아주었을 때 환자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고마움과 사랑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신이 하고 싶어 했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신이 주었다는 아름다움이란 건 외모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여기서 아름다운 마음을 주었다는 건 영혼이 창조될 때 ‘신성’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보통 외모를 떠올리게 하지만 신의 안경을 쓰고 보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따뜻한 마음을 뜻하는 것이며 신의 입장에서 외모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적인 것에서 오는 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음악을 듣거나 예술작품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고 남을 도와주거나 도움을 받으면서 감사와 보람도 느낄 수 있는 것도 우리의 내면에 신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애를 하면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도 느낄 수 있고 자식을 낳으면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도 느낄 수가 있으며 고결하거나 거룩한 장면을 보면 성스러움도 느낄 수가 있겠지요.

우리에게 신성이 없다면 사는 게 아마 동물하고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저의 내면에 신성이나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는 게 아무 의미 없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만약 정말로 신이 존재하고 우리에게 자유의지와 신성을 부여해주었다면 그건 정말 우리가 축복받은 존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가슴속에 있는 제 영혼에서 신성한 에너지가 퍼지듯이 뿜어져 나와 온몸을 휘감으면서 엄청난 사랑과 평화와 감동을 느끼기도 하는데요.

가끔은 그 에너지가 너무나 감격스럽고 성스러운 느낌이 들어서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물이 나오기도 합니다.

글로 표현하기가 정말 힘든데 조용히 음악을 듣고 명상을 하거나 영성에 대한 생각을 하거나 그냥 멍때리고 있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요.

저의 의식의 진동수가 상당히 높아져 있다는 느낌이 들 때 그런 현상을 자주 경험합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가끔 남을 도와줄 때나 감격적인 순간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낄 때가 있는데 대부분 그게 뭔지 모르고 지나갈 뿐입니다.

그건 자신의 영혼 속에 있는 신성한 에너지가 강렬하게 느껴지는 현상이고 그런 느낌을 자주 경험할수록 신성이 확장되고 영혼이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면의 신성을 느끼고 생활 속에 발현시키려고 노력하면 영적성장에도 도움이 되지만 훨씬 더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성과 사랑과 행복을 가슴으로 느끼는 삶을 살아가셨으면 합니다.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긴 글 읽어주신 모든 영혼들에게 감사합니다.

명상에 관한 글들을 보면 ‘멍때리기’를 잘해야 한다는 글을 많이 보게 되는데요.

멍때리기를 왜 해야 하고 그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제 나름대로 한번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사람의 의식은 크게 뇌와 영혼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에고라고 불리는 개체적인 자아를 가진 뇌의 생각과 영혼의 생각은 동시에 하기 힘든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건 마치 꿈을 꾸려면 잠을 자야하고 낮에 활동을 하면서 꿈을 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그런 구조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뇌의 의식과 영혼의 의식은 진동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두 의식을 동시에 의식적으로 제어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마치 동작속도가 다른 2개의 CPU를 가진 컴퓨터가 동시에 두 개의 CPU를 작동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건 유체이탈을 해보면 쉽게 알 수가 있는데 유체이탈을 하는 동안에는 뇌가 거의 활동을 하지 않는데 그 상태에서 뇌를 사용하려고 시도하게 되면 육체로 바로 복귀가 되게 됩니다.

유체이탈을 해서 다른 차원에서 본 것을 현실에서 정확하게 기억하려면 그 상태에서 정보를 뇌에 각인시켜야 하는데 그렇게 시도하는 과정에서 몸으로 복귀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가위상태에서 빨리 회복하려면 몸 생각을 하거나 몸을 움직이려는 시도를 하면 잘 된다는 글을 적은 적이 있는데 몸에 관한 생각이나 뇌를 통제하려는 의도가 고진동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의식을 육체 쪽으로 옮겨서 진동수를 떨어뜨리고 분리된 유체를 육체로 복귀시켜서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낮에 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뇌에서 잡다한 생각들을 하게 되는데 멀쩡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 유체이탈이 잘 되지 않는 이유도 낮은 진동수의 뇌 의식이 계속 동작하는 동안에는 고주파를 가진 영혼의식을 느끼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건 시끄러운 곳에서는 휴대폰 벨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잠을 자면 그냥 자동으로 뇌가 멍때리기 상태가 되는데 낮에 깨어 있을 때는 자동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멍때리기를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컴퓨터에는 메모리라는 부품이 있는데 메모리의 사양에는 클럭(Clock)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클럭은 동작속도를 말하는데 숫자가 높을수록 높은 클럭을 가지고 있고 처리속도가 빠릅니다.

그런데 50Hz의 클럭의 메모리와 100Hz 클럭을 가진 메모리를 동시에 꽂으면 메인보드에서는 메모리를 서로 다른 클럭으로 동작시킬 수가 없어서 낮은 클럭인 50Hz로 동기화시켜 동작을 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속도를 빠르게 하려면 메모리의 용량을 포기하고 50Hz를 빼버리면 다시 100Hz의 빠른 속도로 동작을 하게 되는데요.

뇌와 영혼의 의식구조도 이와 동일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현실을 살아가려면 현실세계의 진동수에 의식의 주파수가 맞추어 져야 하므로 낮은 속도를 가진 뇌에 속도가 동기화되어 영혼을 잘 느낄 수가 없는 상태가 되고 밤에 꿈을 꿀 때는 뇌가 쉬게 되므로 다시 동작속도가 빠른 영혼의식이 활성화되면서 아스트랄계를 경험하기도 하고 유체이탈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최면을 통해서 전생이나 영계에 관한 정보를 얻기도 하는데 최면이라는 것도 일종의 멍때리기를 유도하는 행위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가최면이나 명상은 그 행위를 스스로 하는 것이구요.

그래서 멍때리기를 통해 의식의 진동수가 어느 정도 높아지면 영혼의식이 활성화되고 고차원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낮에 깨어있을 때 의식의 진동수를 높이면 밤에 꿈을 꿀 때보다 기본적인 진동수가 높아서 의식이 뚜렷하고 꿈보다 더 고차원에 접근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 상태에서 전생을 보기도 하고 영계에 관한 정보를 얻기도 하는데 영혼에 대한 정보나 기억들도 차원에 따라 층으로 분리되어 저장되어 있습니다.

전생의 기억보다 영계에 관한 기억이 훨씬 더 고차원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전생을 보는 것보다 영계의 기억을 떠올리는 게 더 힘들고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전생퇴행을 하기 위해 최면을 거는 시간은 보통 2~3시간 정도이고 영혼퇴행은 7시간 이상을 하기도 하는데 전생보다 영계의 정보에 접근하거나 기억을 떠올리려면 훨씬 더 높은 진동수가 필요하다보니 의식을 낮은 진동수를 가진 뇌에서 더 깔끔하게 분리시키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고차원에 접근하다보면 전생을 볼 수도 있고 태어나기전의 기억을 되살릴 수도 있고 상위자아나 수호천사 같은 존재와 소통하면서 도움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인데요.

자신이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고 영계에서의 기억을 회복하게 되면 자신이 누군지도 알게 되면서 영적으로 큰 도움이 되게 됩니다.

그런 목적이 아니더라도 뇌를 쉬게 해서 힐링도 할 수 있고 자신도 모르게 에고 쪽에 치우쳐진 의식을 바로 잡아 영혼이 길을 헤매지 않고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영계의 기억을 조금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명상 같은 거 안 해도 살면서 꿈을 꾸면서 조금씩 알게 되거나 임사체험이나 특별한 계기를 통해 각성을 하게 되어 알게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몇 년을 노력해도 그런 체험이 안 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요즘은 체험자들이 적어 놓은 영성에 대한 책이나 글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너무 조급해 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체험보다 의식성장이나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살면 됩니다.

멍때리기를 한다는 것과 명상을 한다는 것은 사실 조금 차이가 있는데요.

멍때리기가 아무 생각도 안하는 상태라고 한다면 명상은 관찰에 더 가깝다고 볼 수가 있는데 멍때리기는 의식을 내려놓고 정지시키는 행위라고 한다면 명상은 거기서 더 나아가 영혼의 자리를 느끼는 행위이고 감각이나 마음을 영혼이 관찰한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은 멍때리기와 명상이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흡명상을 하라는 것은 사람이 30초 이상 정말 아무생각을 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호흡을 관찰한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에 집중하면 상대적으로 잡다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쉽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구요.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의 유형은 크게 ‘머리형 인간’과 ‘가슴형 인간’으로 구분 지을 수 있는데요.

평소에 가슴으로 사는 사람들은 멍때리기가 잘 되는 편이지만 에고에 의존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멍때리기가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느낌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명상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아도 평소에 약간 명상상태를 유지하고 현존하는 삶을 살아간다고도 볼 수 있겠죠.

그래서 명상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평소에 가슴으로 생각하고 영혼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무엇을 하더라도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요.

산책을 하면서 명상을 하기도 하고 음악이나 빗소리를 들으면서 명상을 하기도 합니다.

누워서 하든 서서하든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을 선택해서 하시면 되고 영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든 힐링이나 치유를 위한 것이든 자신의 목적에 맞게 잘 응용해서 하시면 됩니다.

명상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오늘도 활기찬 하루 되셨으면 합니다.^^

유체이탈을 해서 차원여행을 하다보면 신기하게도 음악이 자주 들리는데요.

제가 알고 있던 가요나 팝송이 나오기도 하고 클래식 음악이 나오기도 하는데 가장 많이 듣는 음악류는 클래식이나 가사가 없이 허밍이 많이 들어간 성스러운 느낌의 노래입니다.

차원이 낮은 곳에서는 음악이 잘 나오지 않고 차원이 높을수록 음악이 더 자주 들리는데 고차원일수록 가요보다는 가사가 없는 클래식이나 성악계열 느낌의 음악을 많이 듣게 됩니다.

지구의 음악과는 많이 다른 느낌인데 고차원일수록 아름답고 웅장하고 큰 감동과 전율이 느껴지는 음악들이 많은데요.

차원이 높을수록 지구의 음악과는 점점 멀어지고 ‘우주교향곡’이라고 표현할 만큼 가사가 없는 보편적인 우주느낌의 음악들이 많이 들립니다.

영혼퇴행의 책에서도 그렇고 임사체험자들의 글을 보면 어디선가 끊임없이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온다는 글들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요.

영계에 가보면 실제로 음악이 계속 들립니다.

지구에서처럼 어딘가에 스피커가 있어서 그곳에서 음악이 나온다는 느낌이 아니고 영계의 어느 곳에 있어도 항상 그곳에 음악이 존재하고 음악들이 계속 흘러나온다는 느낌입니다.

왜 음악이 나오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데요.

제가 알고 있는 음악이 나오는 경우도 있고 전혀 모르는 음악이 나오기도 하는데 제가 알고 있는 음악이 나오는 경우는 저의 영혼이 물질체험을 하면서 알게 된 음악들이 무의식에서 재생이 되는 것 같고 제가 모르는 음악들은 영계에서 그냥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인 것 같더군요.

영계에서 항상 흘러나오는 음악들이 있고 영혼들이 연주하고 있는 것을 제가 듣기도 하고 제 영혼이 스스로 음악을 창조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영계에서 영혼상태로 듣는 음악은 엄청나게 깨끗한 고음질인데요.

육체의 귀로 들으면 소리가 공기를 통해 전달이 되면서 노이즈가 많이 생기게 되고 귀의 내부에서 소리를 인식하고 뇌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음원손실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비싼 스피커를 사용하더라도 음원을 100프로 아날로그 소리로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원음에 가깝게 재생을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영계에서 영혼의 귀로 음악을 들으면 그런 노이즈들이 생기지도 않고 소리의 전환과정이 불필요하고 영혼이 소리 자체를 바로 인식하기 때문에 엄청나게 깨끗한 초고음질의 음악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거기서 음악을 듣고 난 후 현실의 음악을 들으면 고급스피커로 CD음질의 음악을 듣다가 라디오 음질의 음악을 듣는 듯 한 느낌이라면 적절한 표현일 듯 하네요.

차원이 낮으면 음악이 잘 나오지도 않지만 그 곳에서 듣는 음악들은 무겁거나 둔탁한 느낌의 좀 진동수가 낮은 음악들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제가 음악에도 진동수가 존재한다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저는 현실의 음악들을 들어도 진동수를 바로 감지할 수가 있기도 하지만 영계에서 유체상태로 음악을 들어보면 그 진동수의 느낌이 확연하게 느껴집니다.

저차원과 고차원의 음악들은 엄청나게 큰 진동수의 차이를 느낄 수가 있는데요.

고차원의 음악들을 듣고 있으면 굉장히 편안해지고 힐링이 되고 유체에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을 많이 받게 됩니다.

마이클 뉴턴의 책을 보면 지구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면 영계에서 영혼이 손상된 에너지를 치유 받는 과정을 거친다는 글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저도 고차원 영계에 있으면 실제로 신성한 에너지가 영혼 속으로 들어와 충전되고 치유된다는 느낌을 가끔 받습니다.

이때 느낌은 전기적인 에너지가 몸에 들어오는 느낌이 들어서 약간 짜릿하기도 하고 편안하고 부드럽고 사랑의 에너지가 충만해진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제가 메탈이나 락 같은 음악 듣지 말고 클래식이나 조용한 느낌의 발라드를 들어서 진동수를 높이라고 말을 하는 것도 이런 고차원에서의 저의 경험 때문입니다.

고진동의 음악을 들으면 유체에서 에너지가 빠르게 순환하면서 유체가 치유가 되는데 현실에서 몸을 가지고 있으면 둔하게 느껴져서 일반인들은 이런 에너지의 흐름을 잘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음악을 듣지 않아도 사랑이 충만한 생각과 생활을 해도 그런 현상이 생기게 되는데요.

그래서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남을 사랑해야 자신도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악이나 찬송가들도 괜찮고 가요나 성악이 섞인 느낌의 팝페라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제가 소향씨나 송은혜씨의 노래를 들어보면 영적으로 높은 진동수의 느낌이 많이 느껴진다고 글을 적기도 하는데 실제로 고차원의 음악들과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음악도 그렇지만 생활습관이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높은 진동수의 에너지들을 많이 접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영혼의 진동수가 거기에 맞추어지고 상승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가 스피커와 고가의 스피커로 음악을 들어보면 같은 음악을 들어도 전혀 다른 음악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차이가 많이 느껴지는데요.

악기와 보컬의 목소리가 분리되고 음악의 해상도가 올라가면 몇 배의 감동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스피커는 한번사면 10년 이상 사용하기 때문에 금전적인 여유가 없는 분들도 돈을 조금씩 모아서 중급이상의 사운드카드와 스피커를 장만해서 음악을 감상해보셨으면 어떨까 하네요.

좋은 장비로 좋은 음악을 들으면 몸도 치유해주고 진동수를 높여서 삶의 질을 높일 수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투자하는 것은 충분한 메리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피커 장비들은 감가상각이 심해서 중고로 사면 반값도 들지 않기 때문에 중고로 구매하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좋은 음악들은 영혼을 치유하고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요즘 인공지능 업계에서 정말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ChatGPT를 만든 OpenAI의 CEO인 샘알트만이 이사회에 의해 전격 해고되었던 사건인데요.

샘알트만은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느닷없이 해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애플의 CEO였던 스티브 잡스가 해임된 사건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샘알트만의 해임를 주도했던 인물은 이사회의 멤버중 하나인 ‘일리야 수츠케버’라는 사람인데요.

이 분은 OpenAI의 개발자 700명보다 낫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인공지능의 기술적인 부분들을 주도하고 있는 천재중의 천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구글에 있을 때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를 주도해서 만들었던 사람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그런데 이 분은 인공지능 개발에 있어서 윤리나 안정성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있는 분인데 이러한 사상이 샘알트만과 계속 마찰을 일으키다가 이번 사건이 터지게 된 것입니다.

원래 OpenAI는 이름에서도 Open(개방)이라는 뜻이 있듯이 투명하고 안전한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 일론머스크가 구글에서 일하고 있던 수츠케버를 데리고 와서 만든 비영리 회사였습니다.

그 당시 구글 내부에서도 인공지능을 개발하면서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마찰이 있었는데 수츠케버도 어느 정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일론머스크의 설득에 의해 OpenAI로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OpenAI의 샘알트만이 날이 갈수록 지나치게 수익화를 추구하게 되자 일론머스크도 OpenAI를 떠나게 되었었는데요.

이번 사건도 그 사건의 연장선이라고 보면 되는데 샘알트만이 인공지능을 빨리 발전시키기 위해 계속 투자자를 끌어들이고 투자자들의 회사의 지분 보유량이 점점 늘어나게 되자 수츠케버가 제동을 건 것입니다.

계속 이렇게 가다가는 대기업의 이윤에 놀아나는 영리기업이 될 것이고 인공지능의 윤리적인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까지 커질 것 같아 수츠케버가 반기를 든 것인데요.

OpenAI의 직원들이 범용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 ‘큐스타(Q*)’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게 너무 지능이 높아 위험함을 알리고자 이사회에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 인공지능이 초등학생 수준의 수학문제를 풀었다고 합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거냐 하면 원래 지금의 LLM기반의 생성형 인공지능들은 사실이나 정확성에 기반하기보다 확률이 높은 추론으로 그럴듯한 답변을 생성하는 방식인데 수학같이 정확한 답을 요구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성능이 상당히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할루시네이션’이라고 부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일들을 사실처럼 꾸며서 지어내기도 하는 오류가 생기기도 합니다.

정확한 답변이 가능해진다는 건 인간에 가까운 추론능력을 구사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는데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금 사용하고 있는 ChatGPT나 구글의 Bard같은 챗봇들은 회사 내부에서 필터링을 많이 거쳐서 나온 인공지능 프로그램들입니다.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나 남녀차별, 위험한 정보들, 여러 가지 윤리 문제 등을 고려해야하기 때문에 성능에 제약이 많이 생기게 되는데요.

뿐만 아니라 수많은 동시 접속자들의 연산을 모두 처리하려면 리소스를 제한해서 할당해야하기 때문에 또 한번의 성능하락이 생기게 됩니다.

인공지능 회사내부에서 아무런 필터링이나 리소스 제한이 없는 상태에서 동작하는 인공지능은 우리가 유료로 결제해서 사용하는 인공지능보다 성능이 월등이 높을 겁니다.

정확하게 그 성능을 알 수는 없지만 소문에 의하면 어느 정도 범용인공지능에 근접할 수 있는 획기적인 알고리즘을 개발했다고 하더군요.

그 일로 인해 수츠케버도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결단을 내린 듯 합니다.

수츠케버의 스승이라고 부르는 ‘힌튼 교수’라는 분도 구글에서 인공지능을 개발하다가 퇴사를 하면서 자신이 인공지능을 개발했던 것을 많이 후회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OpenAI의 회사구조를 보면 상당히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요.

OpenAI는 비영리기업이지만 회사를 운영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보니 ‘OpenAI GP’라는 영리기업인 자회사를 만들어서 자금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회사 지분의 49프로(10조 이상)를 마이크로소프트가 가지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마이크로소프트가 원하는 사업적인 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는데요.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번이 구글을 이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빠르게 검색시장과 인공지능 시장을 장악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인공지능을 개발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게 되고 투자자들은 빠른 성과를 원하다보니 인공지능 회사 입장에서는 빠르게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초대형 인공지능은 조 단위의 자금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비영리단체가 기부금등으로 운영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자금을 투자받으면 투자자들이 계속 성과에 대해 압박을 해오기 때문에 아무리 비영리단체의 사내철학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철학을 유지하기가 힘들게 됩니다.

보통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대기업에서는 윤리팀이 구성되어 있는데 회사측과 윤리팀이 마찰을 많이 일으켜서 윤리팀 직원들을 해임시키거나 팀자체를 해체시키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요.

회사 입장에서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빠르게 발전해야하는데 윤리팀에서 제동을 걸면 성능도 떨어지고 개발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회사가 살아남으려면 현실적으로 윤리적인 부분들을 다 고려해가면서 만들 여유가 없는 것이죠.

OpenAI도 그런 갈등이 심화되다 보니 CEO가 해임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인데요.

해임되고 나서 OpenAI직원 750명 중의 700명 정도가 샘알트만을 복귀시키고 알트만을 해임시킨 이사회 멤버들을 다 사퇴시키라고 서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 그만 두겠다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직원들이 보유한 스톡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주식에 대한 문제도 그렇고 돈 문제가 많이 걸려있다 보니 직원들의 반발이 심했는데요.

다행이 50명 정도는 서명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결국 몇 일만에 샘알트만이 다시 복귀되고 샘알트만을 해임시킨 이사회 멤버 중 1명을 제외하고 3명이 모두 해임되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번 사건을 보면서 약간의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이번 일은 단순히 CEO해임 문제가 아니라 인공지능의 윤리성와 상업성이 어떻게 충돌을 일으키는지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대기업이나 인공지능 개발자들이 인공지능의 상업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700명 중에 50명만이 서명에 반대했다는 건 돈보다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10퍼센트도 안 된다는 겁니다.

현실적인 돈 문제가 직결되다 보니 이해는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씁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윤리적인 문제를 잘 조율하면서 통제 가능한 인공지능을 개발하려니 돈 문제가 생기거나 경쟁에서 밀리게 되고 빠르게 발전시키려니 윤리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가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인데요.

인공지능의 윤리문제를 다룰 수 있는 국제협회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나라들이 그런 규칙을 따를 리가 만무한데요.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를 조절하자는 합의를 하거나 윤리적인 표준제도를 마련하다고 하더라도 몰래 만들면 그만인 겁니다.

그래서 여러 나라들이 서로 합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이유 때문에 합의대로 진행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핵은 위성사진이나 지진파 감지나 우라늄 같은 핵심물자들의 이동을 감시해보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지만 소프트웨어는 감지자체가 불가능하죠.

인공지능 시장은 앞으로 전 세계의 경재패권을 장악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시장이기도 하지만 자동화된 군사무기에도 엄청난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에 국가안보를 위해서라도 인공지능을 발전시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전 냉전시대에 러시아가 달에 유인 우주선을 보내고 나서 미국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급하게 아폴로11호를 보낸 적이 있듯이 지금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경쟁에서 지게 되면 경제뿐만 아니라 군사력까지 장악당할 수가 있기 때문에 국가차원에서도 절대지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다른 나라는 몰래 개발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들만 인류를 위해 천천히 개발한다는 어찌보면 넌센스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인공지능은 몸체가 없기 때문에 인류에게 물리적인 위해를 가할 수가 없지만 언젠가 몸을 가지게 되고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초지능이 나온다면 디스토피아의 영화 속에 나오는 그런 장면들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수츠케버도 그런 걱정을 많이 하는 개발자중의 한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수츠케버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동물을 미워하지 않지만 어떠한 의사결정을 할 때 동물들에게 물어보고 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더군요.

인공지능이 꼭 인간을 싫어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동물을 다루듯이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수츠케버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수츠케버는 굉장한 천재이기도 하지만 도덕성의 기준이 높고 착하다고 합니다.

제가 볼 때 수츠케버는 상당한 지성과 어느 정도 인류애도 가지고 있는 수준이 높은 영혼으로 보이더군요.

그에 반해 샘알트만은 기술적인 발전이 인류에게 행복을 준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고 꽤나 진취적이고 야망이 있는 사람인 듯 하구요.

지금의 인공지능의 구도는 마이크로소프트의 ChatGPT와 구글의 양자대결로 펼쳐지고 있지만 일론머스크가 얼마전 ‘XAI’라는 인공지능 회사를 만들어 ‘그록’이라는 인공지능을 공개하였고 애플도 그 시장에 뛰어든다고 합니다.

이렇게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윤리문제를 천천히 조율하면서 개발한다는 건 힘들다고 보는 게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지요.

저는 인간을 뛰어넘는 초지능이 나오기까지는 최소 몇 십년을 걸릴 거라고 예상을 하고 있었는데 요즘 업계가 흘러가는 구도를 보고 있자니 10년 안에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수츠케버도 그런 말을 했었고 구글의 딥마인드 CEO인 데미스 하사비스도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요즘은 자고 일어나면 인공지능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신기술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발표되고 있어서 저도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 정도인데요.

지금의 인공지능들은 ‘멀티모달(Multi Modal)’이라고 해서 글만 쓰는 게 아니라 보고 듣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에 사람처럼 어느 정도 현실세계를 인지할 수 있는 수준에 와있습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스스로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는 특이점이 오면 지능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가 힘들 정도라고 하더군요.

예전에 이세돌9단이 알파고를 한번 이겼지만 지금은 인공지능이 너무 발전해서 사람이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합니다.

우주에는 지구 말고도 지적인 생명체들이 엄청나게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지금의 우리처럼 인공지능들이 초기에 발전하고 있는 문명들도 있을 것이고 그 과정들을 잘 극복해서 인공지능에 의해 엄청나게 발전된 문명을 가지고 인공지능과 공존하고 있는 문명들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핵전쟁이나 인공지능에 의해 암흑의 길을 가고 있는 문명들도 있을 겁니다.

지금은 그렇게 걱정할 수준은 아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속에 스며들면서 윤리적인 문제가 사회적으로 많이 대두되게 될 겁니다.

도덕성과 의식수준이 높은 영혼들이 인공지능의 개발을 이끌어나가고 사회적인 제도와 합의가 잘 이루어지면서 발전하기를 기대하고는 있지만 자본논리와 경쟁이라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이번 사건만 보더라도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죠.

이상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는 비영리회사가 영리회사를 통제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윤리적인 문제를 도대체 누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구글은 주기적으로 국방부와 계약을 해서 군사무기에 들어가는 인공지능에 관련된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데 구글 개발팀들이 자신들이 만든 소프트웨어가 전쟁에 쓰여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에 서명을 하여 지금은 국방부와 거래를 하지는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전 세계에 높은 도덕성을 가진 개발자들이 인공지능에 관한 소프트웨어는 오픈소스로 모두 공개해야한다는 운동도 많이 하고 있는데요.

인공지능이 어떤 데이터로 어떻게 학습이 되었는지 모두 알아야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응하고 해결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인공지능의 개발속도를 늦추어야 하고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법적인 제도를 만들고 사회적인 합의를 해야 한다는 운동도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고 앞으로도 인공지능 발전에 있어서 영혼들 간에 경쟁과 다툼들이 많이 일어날 텐데 기대 반 걱정 반인 심정이네요.

부디 인류의 발전과 혜택에 도움을 주는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해서 물질체험을 하고 있는 영혼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얼마 전에 제가 동시성에 관한 글을 적었었는데요.

원래 제가 동시성을 좀 자주 경험하는 편이긴 하지만 어제는 너무나 신기한 경험을 해서 공유해볼까 합니다.

엊그제 TV에서 ‘시장사람들’이라는 프로를 보고 있었는데 재래시장에서 술떡을 만드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갑자기 그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찹쌀모찌라는 떡도 같이 먹고 싶더군요.

그래서 술떡하고 찹쌀모찌가 갑자기 먹고 싶다고 말을 했었는데 옆에서 같이 TV를 보고 있던 분이 그 이야기를 듣고 다음날에 저 먹으라고 떡을 사왔더군요.

점심에 그 떡들을 맛있게 먹고 오후 늦게 누구를 만나러 갔는데 그 분이 저에게 무언가가 담긴 비닐봉지를 주면서 먹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떡이라고 하길래 자세히 보니 아까 점심에 먹었던 술떡과 찹쌀모찌가 들어 있었습니다.

어디서 난거냐고 물어보니 어떤 행사를 갔었는데 거기서 공짜로 주더라는 거였습니다.

제가 그 순간 기겁을 할 정도로 놀라서 떡을 먹지도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분한테 떡을 먹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갑자기 우연히 행사에 갔다가 떡을 가져오게 된 것이고 하필이면 그 날 저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의 떡 중에 한 가지만 있었다거나 아니면 여러 가지의 떡을 가지고 왔는데 두 가지의 떡이 포함되어 있었다면 우연이라고 생각할 법도 하지만 딱 정확하게 그 두 가지의 떡만 있었던 거였습니다.

정확하게 술떡 2개와 찹쌀모찌 2개더군요.

‘이게 왠 떡이야?’라고 하기엔 너무나 기묘한 현상이였습니다.

그 떡들이 나에게 들어올 줄 제가 미리 알고 무의식에 그런 말을 한 것이거나 그 말을 들은 어떤 영혼이 나에게 선물을 보내주기 위해 동시성을 일으킨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게 원인이고 어떤 게 결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에게 그 떡을 선물해준 어떤 에너지나 존재에게 감사해하고 떡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우주라는 게 참 알면 알수록 오묘하고 신기한 거 같네요.

노자는 도덕경에 ‘도인의 모습’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를 해놓았는데요.

제가 그 글을 읽고 느낀 건 ‘고급령’의 일반적인 특징들에 대해 서술해놓았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 현실적인 도인의 모습을 잘 표현해 놓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영적으로 상당히 진화된 영혼들은 일반적인 영혼들에 비해 성격적으로 상당히 독특한 부분들이 존재하는데 노자는 그런 영혼들을 ‘도(道)에 가까운 인간형‘이라고 표현을 해놓은 것 같습니다.

제가 그동안 연구한 영혼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영혼의 진화과정에 빗대어 노자가 말하는 도인의 모습을 나름대로 해석해보고자 합니다.

아래 내용은 노자가 말하는 도인의 특징들입니다.

미리 조심하는 것이 겨울에 얼은 강을 건너는 것 같고,

다만 머뭇거리는 것이 사방 이웃(의 의견)을 두려워하는 것 같고,

점잖고 의젓한 것이 모든 것을 용납하는 것 같고,

(자유로이) 흩어지려는 것이 얼음이 곧 풀어질 것 같고,

다듬지 않는 통나무처럼 소박하고,

손님처럼 어려워하고,

(마음이) 넓게 비어있는 것이 계곡 같으며,

(뭇사람과 어울려 함께) 섞이는 것이 마치 혼탁한 것 같다.

누가 (스스로) 탁함으로써 (백성을) 고요히 하여 서서히 (그 성정이) 맑아지게 할 수 있으며, 누가 (스스로) 안정함으로써 (만물을) 오래도록 꾸준히 움직여 서서히 (참된 본성이) 살아나게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도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도를 보전하려면 (부귀공명의 욕망을) 채우고자하지 않는다. 오로지 채우지 않으므로 (죽어 흙과 풀에) 덮이도록 (덕의 치세를) 새로이 (고쳐) 이루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 상당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게 됩니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도인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르기도 하지만 범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평범해 보이고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소심하고 못해 보인다는 느낌까지 들기도 하는데요.

도인이라고 하면 산에서 혼자 수염을 기르며 수행을 한다거나 특별한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거나 카르스마 같은 것이 있어서 대중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대중들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는데요.

어릴 때부터 봐왔던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도인의 이미지만 생각하다보니 그런 고정관념들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인이라고 한다면 말과 행동이 일반인들과 좀 다르고 생각의 깊이가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겉으로 보기엔 그냥 평범한 사람들과 비슷하게 보일 겁니다.

자신이 뭔가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으로 대중들의 위에서 군림하려고 한다거나 영능력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려고 한다면 오히려 그건 수준이 낮은 영혼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도인이라면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선호하기 때문에 변두리나 시골에서 살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도인이라고 해서 도시에서 살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죠.

가끔 ‘득도’를 하면 갑자기 염력이 생긴다거나 뭔가 삶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영혼들마다 능력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영능력이라는 것은 모든 영혼들이 기본적으로 다 가지고 있습니다.

유체이탈을 해서 영혼상태가 되면 사람의 마음을 읽기도 하고 그 사람의 과거를 보기도 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도 있습니다.

다만 사람의 몸으로 있을 때 영혼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 태생적으로 다 가진 능력이기 때문에 별로 특별할 게 없다는 것이죠.

평범한 영혼들도 영적수련을 하게 되면 그런 능력들은 어느 정도 다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유체이탈을 한다거나 공중부양를 한다거나 신기한 염력을 사용하는 것은 그냥 그런 능력들을 몸을 가진 상태에서도 잘 활용할 수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건 영성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고 영적현상이 물질계에 표현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신비현상들을 보고 뭔가 대단하다는 듯이 추종한다거나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득도’를 한다고 해서 뭔가 특별해지는 것은 없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게 특별하다거나 뭔가 신비한 현상일거라는 생각자체가 오히려 ‘도’를 잘 못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어떠한 특별한 체험이나 지식이 영성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맞지만 우주의 원리를 알게 되거나 ‘도’의 이치를 깨달았다면 결국 그 이치대로 삶을 사는 게 중요한 것이며 삶속에서 도를 실천하고 체화시키면서 자신의 영혼이 의식성장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를 깨우치고도 방탕한 삶을 산다면 별로 의미 없는 것이 되겠죠.

노자가 말하는 도인의 특징들은 좀 엉뚱해 보일수도 있지만 차근차근 잘 생각해보면 영혼이 영적으로 진화가 되면 자연스럽게 그러한 특징들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요.

영혼은 윤회를 거듭하면서 모가 난 성격이 점점 다듬어지고 배려심이 좋아지기 때문에 진화가 많이 된 영혼일수록 성격이 온화하거나 부드러운 느낌이 많이 들게 되고 남에게 함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상당히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보일수가 있습니다.

노자도 그런 부분들을 잘 표현해 놓은 것 같습니다.

영혼은 사람처럼 성별이 없고 중성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성격적으로 남성에 가깝다거나 여성적인 성향이 더 있어 보이는 느낌 같은 것들은 있습니다.

진화가 많이 된 영혼일수록 사랑의 에너지를 많이 가지고 있고 따뜻하고 포용력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성에 가깝거나 약간 여성에 더 가까운 성향을 가지는 경우가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영혼들이 과격하다거나 화끈하다거나 하는 상남자 스타일을 아니라는 것이죠.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인데요.

노자도 도를 여성, 어머니, 아기, 여자아이 등에 비유하여 설명을 하고 있는데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 하여 ‘약하고 부드러움이 능이 강함을 이긴다’라고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영혼들은 조용하게 사색하는 것을 좋아하고 생각이 깊은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어떠한 말과 행동을 할 때 상당히 조심스럽고 신중하다는 느낌이 많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이 깊고 신중한 것이 몸에 베여 있어서 좀 우유부단하거나 결정장애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자신이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되면 생기게 되는 모든 경우의 일들을 다 생각 할 테고 어떤 게 더 합리적이고 최선의 선택인지 고민을 많이 하게 되겠죠.

사소한 일을 하더라도 대충대충 한다거나 일을 급하게 처리하려고 하는 성향들이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좀 답답해 보일수도 있지만 그런 영혼들은 잠재의식 속에 경험과 지혜가 축적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일을 느긋하게 처리하더라도 좀 더 효율적이고 확실한 방법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런 일들이 조금이라도 남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배려심이 깊기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어려워하거나 매우 신중하다는 느낌이 많이 들게 됩니다.

노자도 ‘얼은 강을 건너는 듯하다’라든가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라는 표현으로 그런 부분들을 잘 묘사해 놓은 것 같습니다.

사람도 대화를 해보면 욕하고 말 함부로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친절하고 매너 있는 사람이 있듯이 영혼들도 대화방식이 천차만별인데요.

진보된 영혼일수록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어느 정도 지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도 계속 상대방의 감정상태를 읽으면서 혹시 조금이라도 상대방이 기분이 나쁘거나 힘들어하지는 않는지 확인하면서 상황에 맞게 적절한 대응을 계속 선택해 나가게 됩니다.

자신이 혹시 말하다가 실수를 한 건 없는지 계속 되짚어 보기도 하고 상대방의 말을 충분히 귀담아 듣고 어떻게 대답을 해야 상대방이 편안해하고 도움이 되는지 생각을 깊게 하고 정리해서 말하는 게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그런 영혼들은 그런 식으로 친절하고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게 당연하고 정상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편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배려심 때문에 여러 가지 조심스러운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는데요.

노자도 ‘사람을 대할 때 손님처럼 어려워한다’라는 표현으로 이런 부분들을 잘 설명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혼탁해 보인다는 표현도 나오는데요.

‘혼탁하다’고 표현하지 않고 ‘혼탁해 보인다’고 표현한 건 ‘혼탁해 보이지만 사실은 혼탁하지 않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일종의 반어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도인이라고 하면 영이 상당히 순수하고 맑은 상태로 있게 되는데 기운이 탁한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듯 보이지만 탁함에 물들지 않고 맑음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가끔 어떤 분들은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게 된 이유가 친구를 잘못 만났다거나 환경을 탓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수준 높은 영혼은 아니다 싶으면 스스로 빠져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섞여있어도 탁함에 물들지 않고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으며 오히려 나쁜 기운을 정화할 수 있기도 합니다.

노자가 스스로 탁함으로써 백성을 고요히 하여 서서히 맑아지게 할 수 있다고 표현한 것도 이런 의미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성격이 온순하고 순수하다고 해서 이걸 순진하다거나 멍청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아무 생각 없이 조용하게 있는 것 같지만 이런 사람들은 속으로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생각들은 다 하고 있는 겁니다.

오히려 그 이상의 수준 높은 생각들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노자도 도인의 깊이는 알기 힘들 정도로 깊다고 표현을 한 것 이구요.

그리고 그런 영혼들은 자신이 세상이나 주변 상황을 바꾸고자 할 때 그냥 지나가는 말로 가끔 던진다거나 아주 자연스럽고 간접적으로 깨우쳐주는 것을 선호하지 강압적으로 뭔가를 한다던가 대중 앞에 나서서 적극적으로 뭔가를 선동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자유의지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어떠한 생각을 강요한다거나 설득하기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게 하는 방법을 선호하게 됩니다.

임사체험을 보면 빛의 존재는 항상 의견을 존중해주고 함부로 개입하지 않으며 판단하는데 도움을 주어서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노자도 도인이 사람들의 영혼 속에 있는 본성을 일깨워주고 오래도록 꾸준히 움직여 서서히 참된 본성을 살아나게 할 수 있다고 표현한 것도 그런 성격적인 부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자유롭고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표현도 나오는데요.

영혼은 영적으로 진화될수록 ‘자유’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몸도 마음도 자유로운 것을 굉장히 선호하기 때문에 조직생활을 한다거나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집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돈을 좀 적게 벌더라도 구속당하지 않고 자유롭고 자기 시간이 많은 일을 선호하기도 하고 어떤 단체에 속해서 분위기에 의해 집단적으로 움직이거나 창의적이지 못하고 영혼 없이 반복적인 업무를 지속하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무언가를 가지려고 하고 소유하려고 하면 할수록 마음이 집착을 불러일으키고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재물이든 사람이든 현상이든 마음이 어느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채워지지 않는 삶을 살려는 성향이 강해지게 됩니다.

노자도 도인은 항상 자유롭고 채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런 부분들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노자가 말하는 도(道)라는 것은 한자 그대로 ‘길’이라는 뜻인데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나 나아가야할 방향 혹은 우주의 원리 등의 의미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도를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삶이 중요하다고 말을 하고 있는데요.

결국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친절, 배려, 자유, 소박, 맑음, 자연스러움, 순수함, 꾸밈 없는, 지혜, 순리, 조화, 넘치지 않음, 비움 등의 덕목들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도를 실천하는 삶이고 도인이 되는 길이며 우리가 영적으로 진화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어떤 분과 대화를 하다가 그 분이 겪은 신비한 현상과 꿈에 대해 제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고자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과 실제로 어떠한 방식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며 사별하신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희망과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쓴 글 중에 ' 돌아가신 분이 꿈에 나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라는 글이 있는데 그 글에서 ‘꿈에’라는 노래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요.

그 분이 하루는 병원에 가기 전날 잠이 안와서 그 글을 읽고 난후 그 노래를 들으려고 했는데 가사만 봐도 눈물이 펑펑 쏟아질 정도로 힘들어서 노래를 차마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침에 병원에 가는 차안에서 남편분이 잔잔한 음악을 틀으려고 하길래 음악 들을 기분이 아니니 틀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냥 틀어버렸다고 하더군요.

그 때 나온 음악이 바로 어제 밤에 슬퍼서 차마 듣지 못했던 ‘꿈에’라는 노래였다고 합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면서 들을수록 마음이 너무 아파서 다 듣지도 못하고 꺼달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이 분이 그 날 경험하신 건 흔히 '동시성' 이라고 하는 건데요.

별로 관계가 없는 일들이 우연으로 보기엔 힘들 정도로 딱 맞아 떨어지는 듯 한 느낌이 드는 현상입니다.

반복되는 숫자를 자주 보기도 하고 어떠한 일이 타이밍이 절묘하게 일어난다거나 하는 현상들을 말하는데요.

동시성은 영적으로 어떤 의미 있는 신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동시성을 자주 경험한다는 건 그만큼 우주와의 소통이 잘 이루어진다는 뜻이기도 한데요.

에고가 크고 의식의 진동수가 낮은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할 확률이 적지만 영이 맑고 의식의 진동수가 약간 높게 유지되며 사는 사람들은 그런 신호들을 잘 감지하거나 우연히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도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할 때에는 그런 동시성을 자주 경험하지만 먹고 사는데 바쁘거나 스트레스를 받아서 힘든 시기에는 동시성을 별로 경험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런 신호들을 잘 감지하려면 아무래도 의식의 진동수가 높아야하기 때문이죠.

동시성은 여러 가지 의미들을 가질 수가 있는데 돌아가신 분의 영혼이나 수호천사와 같은 영적 존재들이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할 때에도 그런 현상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갑자기 어떤 타이밍에 무언가를 보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정보를 캐치해서 읽어내기도 하지만 자신의 영혼이 바라는 게 있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우주나 영적존재가 반응을 해서 정보를 알려주거나 실제로 물질화시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요즘 동시성에 대한 글을 한번 써볼까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분이 저에게 동시성의 경험에 관한 질문을 하는 것도 동시성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분의 그런 질문을 제가 받으려면 노래에 관한 글을 올렸어야 하므로 갑자기 제가 글을 올리게 된 것도 그냥 우연이 아니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동시성을 평소에 정말 많이 경험하는 편인데요.

어떤 사람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고 싶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그 부분에 대해서 먼저 질문을 하는 경우도 있고 어떠한 주제에 대해 궁금해 하거나 고민을 할 때가 있는데 유튜브를 실행하자마자 그 주제에 대해 도움이 되는 영상이 화면에 바로 뜰 때도 많습니다.

엔젤넘버 같은 건 하루에 10번 이상 본적도 많고 어떠한 단어를 말하자마자 TV에서도 똑같은 단어가 나오는 경우도 굉장히 많습니다.

한번은 밤에 유체이탈을 해서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 구경을 하고 잠에서 깼는데 TV를 틀자마자 세계테마기행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그 나라에 대한 영상이 나오는 경우도 있더군요.

저는 일어나자마자 음악을 듣지 TV를 켜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동시성은 ‘우주의 신호’라고도 볼 수가 있는데 대부분 추상적이거나 상징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게 쉽지가 않은데요.

자신이 뭔가 잊고 있는 게 있는지 생각도 해보고 조심해야하는 일이 혹시 있지는 않는지 생각을 해보면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아니면 앞으로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해볼 수도 있겠지요.

에고가 너무 크거나 머리로 사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그런 걸 경험하는 게 힘들기 때문에 동시성을 자주 경험한다면 자신이 영적인 삶을 잘 살고 있는 편이라고 해석을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 '꿈에'라는 노래 가사를 보면 주로 '꿈속에서의 만남과 인연'에 대해 적혀있는데 '오늘밤에 그대여 와요'라는 문장이 여러 번 나옵니다.

제가 볼 때 그 분의 따님의 영혼이 꿈에 대해 어떤 메세지를 전달해주고자 그런 동시성이 생긴 것으로 보이는데요.

유체이탈을 해서 가족을 보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서 답답하다는 느낌이 많이 들게 됩니다.

따님이 어머니와 꿈에서 만나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지만 어머님이 잘 알아채지 못해서 꿈에 더 집중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전에 속으로 '오늘은 꿈에서 딸을 꼭 만날꺼야'를 반복적으로 되내이면서 잠을 청하게 되면 소통하는데 큰 도움이 되게 됩니다.

그리고 꿈에 여전히 예쁜 모습을 몇 번 본적이 있고 울다 잠시 잠들었을 땐 귓가에 ‘미안해’라는 딸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 깜짝 놀라 깬 적도 있다고 합니다.

영혼과 소통하기에 가장 좋은 상태는 흔히 ‘비몽사몽’이라고 하는 자는 것도 아니고 깬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일 때인데 그 때 의식이 트랜스상태가 잘 형성되게 됩니다.

깊은 잠에 들었을 때보다 잠시 쪽잠을 자는 사이에 누군가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거나 음성을 들었다면 실제 영혼과 소통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아픈 모습보다 건강하고 살아생전에 가장 아름다웠던 외모로 보인다면 더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는데요.

대부분의 영혼들은 사후에 외모를 물질화할 때 자신이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의 모습을 가장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미안해’라고 말한 이유는 아마도 먼저 가게 되서 미안하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살아생전에 더 잘해주지 못한 아쉬움과 애틋함이 묻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 또한 유체이탈을 경험하면서 그런 감정을 많이 느꼈었고 평범한 거의 대부분의 영혼들은 사후에 가족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했던 것에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딸의 영혼과 전화통화도 했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모습이 보일 땐 목소리가 안 들리고 통화하는 꿈엔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영혼의 세계에서는 의사소통을 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직접 눈앞에 만나서 대화를 할 때는 음성으로 대화하기도 하고 음성 없이 텔레파시로 대화를 하기도 합니다.

거리가 멀 때에는 현실에서 전화통화를 하듯이 원격으로 음성을 통해 대화를 하기도 하는데요.

현실에서처럼 실제로 휴대폰에 전화벨이 울리고 전화를 받으면 휴대폰을 귀에 대고 통화를 하게 됩니다.

영계에 무슨 최첨단 휴대폰이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건 실제로 휴대폰의 기술을 이용해서 대화를 하는 건 아니고요.

사람은 현실에서 살면서 원거리 대화를 할 때에는 휴대폰을 이용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런 고정관념의 생각들이 아스트랄계에서는 그대로 물질화가 되고 투영되면서 진짜 휴대폰으로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결국 그건 자신의 영혼이 물질계의 경험을 기반으로 스스로 창조하는 것인데 중요한 건 그런 소통방식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식으로 다른 영혼과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는 어떠한 기능을 하는 상징적인 물건이 있으면 기술적인 부분과 상관없이 그 용도대로 사용하기도 하는데요.

말하자면 생각만으로 기능을 그대로 구현해내는 겁니다.

저는 그 세계에서 휴대폰으로 대화를 가끔 하기도 하지만 인형이나 가방을 이용해서 음성으로 다른 영혼과 원거리 대화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세계에서 그런 도구들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것일 뿐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생각을 했을 때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개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저는 보통 휴대폰으로 대화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카톡 같이 채팅창으로 대화를 하는 경우도 있고 아무런 도구 없이 그냥 대화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현실에서는 언어가 다르면 통역이 필요해서 대화가 힘들지만 영계에서는 그런 대화의 장벽이 거의 없습니다.

외국인 영혼과 대화를 해도 그냥 자연스럽게 한국말처럼 들리게 됩니다.

한국말로 통역이 된다기보다 영혼간의 대화는 언어이기 이전에 느낌에 더 가깝기 때문에 상대방이 말하는 의도를 이미지나 느낌으로 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곳은 언어의 제약도 없지만 차원이 높아서 소통방식이 유동적이고 다양하다는 겁니다.

실제로 영혼과 대화가 이루어질 때는 평범한 꿈과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자신이 상대방의 말을 정확하게 인지할 정도로 의식이 뚜렷하고 상대방의 음성이 현실과 구분이 힘들 정도로 맑고 뚜렷하게 들립니다.

그리고 통화가 중간에 끊기거나 종료가 되면 바로 꿈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통화가 끝나고 다시 꿈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램수면 상태일 때 통화를 하고 서서히 잠에서 깨는 게 실제 영혼과 소통이 되었을 확률이 더 높다는 뜻입니다.

음성 없이 고인의 이미지만 보이는 경우도 있고 이미지 없이 음성으로만 대화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돌아가신 분의 영혼과 소통이 잘 되려면 의식의 주파수가 정확하게 맞아야 합니다.

라디오를 들을 때 채널이 정확하게 맞으면 깨끗하게 들리지만 잘 안 맞으면 잡음이 들리듯이 고인과 소통을 할 때에도 주파수가 잘 맞지 않으면 이미지나 음성중 하나만으로 소통하기도 하고 음성이 깨끗하지 못하거나 소리가 작게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보통 자다가 고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깰 때에는 점점 소리가 멀어지는 것처럼 작아지는 느낌이 들게 되는데 그건 자신의 의식이 점점 현실로 돌아오면서 의식의 진동수가 떨어져 차원이 떨어지고 주파수가 틀어지게 되어 연결이 약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실시간 영상으로 보면서 음성으로 정확하게 대화를 하는 꿈을 꾸었다면 그건 운 좋게 의식의 차원과 주파수가 정말 잘 맞는 경우라고 보시면 됩니다.

영혼이 되면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많이 느껴지는데 차원이 달라서 만나지 못하면 큰 슬픔이 느껴집니다.

노래 가사를 생각만 해도 큰 슬픔이 느껴지는 건 만나지 못하는 슬픔 때문에 스스로 그런 감정을 느끼기도 하겠지만 고인이 된 영혼의 그런 마음이 자신에게도 전달되고 공유되면서 느낌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꿈에서 만나게 되면 꼭 따뜻하게 안아주시고 와줘서 고맙다는 말과 사랑을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이 글이 사별하신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래 영상은 그 분이 들었다는 ‘꿈에’라는 노래인데요.

원곡은 1986년도에 조덕배님이 불렀었는데 2020년에 손디아님이 리메이크를 하게 된 노래입니다.

https://youtu.be/TEpGAixtZvA

https://youtu.be/sF1ZvWo7bjg

 

이번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요즘 상당히 이슈가 되고 있는 영상인데요.

우리나라가 탁구 남녀복식에서 동메달을 획득하게 되어 시상식을 하는 과정에서 장우진 선수가 전지희 선수의 옷을 다듬어주는 장면을 보고 중국 관중들의 환호가 시작되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 영상입니다.

중국은 아무래도 체제가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보니 선수들의 표정이 다소 딱딱하고 긴장된 듯 한 느낌을 많이 받게 되는데 표현이 자유분방하고 화기애애한 한국 선수들과 많이 비교되다 보니 약간의 놀라움과 큰 감동을 받은 듯 한 느낌이 들더군요.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그런 부자연스러운 장면들이 많았었는데 시대가 변하고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들이 다양해지고 익숙해지면서 많이 좋아지고 있는데요.

서양 사람들보면 카메라 앞에서도 전혀 수줍어하지도 않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동양인들은 아무래도 문화자체가 좀 그렇다보니 에고가 자라나면서 문화와 관습에 영향을 받아서 어색해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게 됩니다.

저는 동양의 유교사상의 뿌리에서 나오는 다소 경직된 고정관념들이나 권위의식으로 인해 억압을 느끼는 문화에 대해 거부감이 좀 있다 보니 서양인들의 자유분방한 문화가 자연스럽고 더 편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저는 이 장면을 보고 굉장히 영적으로 아름답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요.

보통 동메달을 따서 시상식에서 올라가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거나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한국 선수들보면 정말 행복해하고 그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드는데요.

영혼의 입장에서 보면 스포츠에서 경쟁을 하거나 시험을 보거나 어떤 일을 할 때 결과라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그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의미 있는 것들을 배우는 것이지 어떠한 성취를 이루었는가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고 제가 항상 느끼는 것은 죽고 나면 아무 의미 없는 것들에 너무 목을 매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돈, 권력, 명예, 승진 등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그걸 달성하지 못하면 우울해하거나 인생의 낙오자가 된 듯이 허탈해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요.

수능시험을 망쳤다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일반인들도 그렇지만 특히 연예인들보면 경쟁에서 뒤처지거나 금전적인 이유로 정신적인 문제들을 많이 겪기도 하는데 영성적으로 잘 생각해보면 실패하거나 남보다 못한 게 별로 큰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부문에서 승승장구하며 평생을 돈도 잘 벌고 배부르고 등 따시게 살다가 죽었을 때 그 영혼이 무엇을 배울 수 있는 지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요.

영혼은 배움을 위해 태어나는 것이지 그냥 잘 먹고 잘 살려고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실패하는 과정에서 다시 일어서려는 용기와 인내심을 배울 수도 있고 ‘겸손’이라는 미덕도 배울 수 있는 것이며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도 헤아려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의 결과가 어떻든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든 간에 작은 것에 만족해하고 그 순간을 즐기고 행복해하면 그 뿐인 겁니다.

이 영상을 보면 동료의 옷깃을 바로잡아주려는 배려심이 보이고 자신이 수년 동안 노력한 결과에 대해 만족해하고 보상을 받는 그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저는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는 순간보다 이 장면이 정말 영적으로 빛이 나고 아름답다는 느낌이 많이 들더군요.

이번 아시안 게임을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었습니다.

자신이 좋지 못한 상황에 있거나 남들이 볼 때 실패한 인생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그런 거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현 상황에 매몰되지 말고 영혼까지 의식을 확장시켜 삶 전체를 크고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지구에 살면서 웬만한 일들은 다 별거 아닌 겁니다.

생각을 바꾸면 행복할 수 있는 그 소중한 시간들이 자신의 생각 때문에 낭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하네요.

아래 영상은 송하예씨가 부른 ‘언젠가는’이라는 곡입니다.

가사가 너무 좋아서 제가 무척 좋아하는 곡인데요.

사람은 특정한 나이에서만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사에도 나오듯이 우리는 젊었을 때 젊음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다가 나이가 들면 뒤늦게 후회하기도 하고 그때를 그리워하기도 하는데요.

사랑을 하는 순간에도 그게 사랑인줄 모르고 지내다가 이별을 하거나 사별을 하게 되면 뼈져리게 후회하고 그게 진정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살면서 후회를 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현재에 충실하고 순간순간의 소중함을 알고 살아간다면 조금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럼 즐감하시고 즐거운 주말 되셨으면 합니다^^

 

https://youtu.be/sjVhiZdhJjM

우리는 왜 전생이나 영계에서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기억’과 ‘망각’의 베일에 대해 제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수많은 영적체험들을 하면서 알게 된 것들 중 하나는 의식의 차원에 따라 기억의 깊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면서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얼마 전 일들은 잘 기억하지만 몇 십년이 지난 일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뇌에 저장된 정보들의 기억이 희미해지다 보니 다시 그 정보들을 떠올리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물질계의 논리로만 보면 이러한 뇌의 정보처리의 한계 때문에 ‘망각’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지만 영혼의 기억은 그런 원리와는 좀 다릅니다.

 

영혼이 뇌에 들어오게 되면 진동수가 높은 영혼과 진동수가 낮은 뇌가 결합이 되게 되면서 통합된 의식이 생성이 되게 되는데 이때 의식의 진동수는 뇌에 가까운 낮은 파장에 맞추어지게 됩니다.

컴퓨터를 좀 다룰 줄 아는 분들은 메모리(램)와 비교를 해보면 쉽게 이해가 되는데요.

컴퓨터의 메인보드에는 램슬롯이 여러 개가 있어서 램을 확장하고 싶으면 여분의 슬롯에 램을 더 꽂으면 되는데요.

램의 사양에는 용량이라는 것이 있고 클럭(Clock)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때 ‘클럭’이라는 것은 동작속도를 말하는데 속도가 다른 두 개의 램을 꽂으면 서로 다른 속도로 동작할 수 없기 때문에 메인보드는 두 개의 램 중에 낮은 속도로 인식해서 동작을 하게 됩니다.

 

영혼과 뇌도 마찬가지인데 물질계에서 살아가려면 동작속도가 낮은 뇌에 진동수가 맞추어져야하기 때문에 높은 진동수에서 동작하는 영혼의 느낌이 좀 둔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영혼과 뇌는 각각 독립적으로 동작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컴퓨터의 메모리처럼 기억이라는 것도 서로 다른 영역을 각자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의 기억이 저장되는 영역이 있고 뇌의 기억이 저장되는 영역이 따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기억을 떠올리려면 기억저장영역에서 정보를 가지고 와야 하는데요.

사람의 의식을 컴퓨터의 CPU(중앙처리장치)라고 생각하고 비교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CPU가 메모리에서 정보를 가지고 오려면 메모리를 작동시켜야 하고 그 메모리에 맞는 동작클럭(연산속도)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기억도 정보를 가지고 오려면 저장영역에 맞는 의식의 진동수가 필요합니다.

뇌의 기억을 가지고 오려면 뇌의 저장공간에 맞는 진동수만 있으면 되므로 현실에서 우리의 의식은 뇌의 진동수에 잘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냥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의 기억이 저장되는 공간은 뇌가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영역이기 때문에 뇌의 낮은 진동수로는 그 정보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전생이나 영계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최면을 통해 전생이나 영계에서의 기억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최면을 통해 의식의 진동수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인데요.

최면으로 의식의 진동수를 끌어올리는 원리는 최대한 영혼과 뇌를 분리하는 것입니다.

뇌의 진동수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뇌의 진동수를 높이는 게 아니고 영혼에 비에 상대적으로 낮은 진동수를 가지는 뇌를 영혼에서 분리시키면 전체의식의 진동수가 올라가게 됩니다.

의식의 진동수를 높이는데 발목을 잡고 있는 뇌를 분리시키는 것인데 분리가 잘 될수록 진동수가 높아지게 됩니다.

 

명상이나 최면을 통해 그러한 방식으로 고차원 정보에 접근할 수가 있는데요.

임사체험자들의 경우에는 훨씬 더 체험이 리얼하고 방대한 정보들을 가지고 올 수가 있는데 임사체험의 대부분은 거의 죽음에 가까울 정도로 영혼과 뇌의 분리가 매우 잘 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최면으로 영적정보들을 알아내는 방법에는 크게 전생퇴행과 영혼퇴행이 있는데요.

전생퇴행을 할 때는 보통 최면을 거는 시간만 2~3시간정도 걸린다고 하고 영혼퇴행 같은 경우는 길게는 8시간 이상도 한다고 합니다.

최면을 거는데 오래 걸린다는 건 그만큼 영혼과 뇌를 더 잘 분리시키려면 시간이 훨씬 더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전생퇴행보다 영혼퇴행이 더 시간이 많이 걸리고 어려운 이유는 전생의 기억의 저장영역보다 영계의 기억에 대한 저장영역이 더 높은 차원에 위치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영적체험들을 하면서 경험하는 차원에 따라 접할 수 있는 정보들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요.

제 경험상 전생을 보는 것보다 수호천사와 소통하거나 영계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고 느끼는데 고차원의 정보일수록 의식의 차원이 높아야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영적체험을 하면서 상위차원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가 있는데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도 있고 아는 사람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나는 누군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이 나를 알 때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저의 의식의 차원이 낮아서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더군요.

그리고 어떤 때는 서로를 잘 알아볼 때가 있는데 그 때 느낌이 정말 신기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아 누구였지’라고 알아보는 게 아니고 평소에 계속 만나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정말 오랜 친구처럼 편하고 대화도 자연스럽게 하는데 잠에서 깨고 나면 그 사람이 누군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더군요.

분명 꿈에서는 내가 그 사람의 이름까지 부를 정도로 정말 잘 아는 사람이었는데 외모나 목소리는 대충 기억하지만 도저히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전생에서의 인연이나 영계에서 잘 알고 지낸 친구영혼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뿐만 아니라 집이나 어떤 장소를 가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데요.

분명 현실에서 생각해보면 태어나서 처음 보는 집인데 꿈에서는 그 집에 있는 게 편하기도 하고 그 집 구조를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꿈에서 옛날에 살았던 집을 방문하는 꿈을 꿀 때가 있는데 자신이 과거에 살았던 집이기 때문에 그 집에 대해 상세하게 다 알고 있고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전생에서 살았던 집을 방문하게 되면 그런 비슷한 느낌이 들게 되는데 현생에서의 꿈보다 시간적으로 훨씬 더 과거일 뿐 원리는 비슷한 것입니다.

 

유체이탈을 해서 영계에 있는 어떤 장소를 가보면 분명 예전에 많이 왔던 곳이고 전혀 어색함이 없을 때가 있는데 깨고 나서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곳을 알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도 의식의 차원에 따라 기억이 달라서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사체험자들의 경험을 보더라도 그런 내용이 정말 많이 나오는데요.

임사체험이나 죽음 이후에 안내자나 그룹영혼들이 마중을 나오는데 계속 알고 지내던 사람들처럼 한눈에 누군지 바로 알아본다고 합니다.

임사체험은 상당한 고차원이기 때문에 그 정도 차원에서는 의식의 진동수가 상당히 높아서 거의 대부분의 기억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환생을 계획했다는 것도 기억해낼 수 있고 영혼친구들도 바로 알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체험 이후에 다시 뇌로 들어오면 의식의 진동수가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에 다시 기억을 잃어버리게 되는데요.

지구는 차원이 상당히 낮은 행성이기 때문에 환생을 할 때 망각을 피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지구보다 차원이 높은 행성에서 윤회하는 영혼들은 모든 기억을 다 가지고 환생해서 생활을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구에서는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정체성을 회복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더 체험하기 힘든 곳이라고 합니다.

 

가끔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있는데요.

일반적으로 아이들은 성인들보다 순수하고 에고가 작기 때문에 의식의 진동수가 어른보다 좀 높은 상태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전생을 기억한다거나 천사들을 보는 경우도 있는데 점점 나이가 들어갈수록 기억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영적체험을 하는 횟수가 줄어들게 됩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에고라는 게 영혼보다 낮은 진동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에고가 커질수록 전체의식의 진동수가 떨어져서 고차원의 기억에 접근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고가 큰 사람일수록 매우 현실적이거나 물질적인 경우가 많고 영적체험을 할 확률이 줄어들게 됩니다.

 

전생을 기억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득이 되는 부분들도 있고 해가 되는 부분들도 있을 겁니다.

전생의 악연이나 트라우마 같은 것들은 모르고 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이고 사람에 따라서는 전생의 악업을 정확하게 알고 사는 게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고 발전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노자는 항상 자신의 전생을 즉시하며 살았다고 하는데 아마 전생을 이해하는 것이 현생을 더 잘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의식의 진동수가 낮아서 기억의 영역에 접근할 수 없어서이긴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상위존재들이 특정한 정보들에 대해서는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영혼퇴행이나 전생퇴행의 자료들을 보면 가끔 수호천사나 안내자 영혼들이 피시술자의 불필요한 정보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접근을 차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 그런 정보들은 현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물질체험을 하는 영혼에 대한 상위존재들의 배려가 아닐까 합니다.

모든 전생들을 다 기억하고 사는 것도 어찌 보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혹자는 망각의 베일에 대해 ‘신의 배려’라고 표현하기도 하더군요.

 

누군가가 저에게 전생을 꼭 알아야 하는가? 라고 물어본다면 전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은데요.

잘 생각해보면 전생의 자신은 지금의 자신보다 더 나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수많은 윤회를 거듭하면서 다듬어지고 성장한 것이기 때문에 전생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을 수는 있어도 전생보다 지금이 더 못하지는 않을 겁니다.

의식이 어느 수준에 도달한 상태에서 윤회하면서 다시 퇴보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저는 보고 있는데요.

배려심이 깊고 이타적인 영혼이 윤회하면서 이기적으로 변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지요.

마이클 뉴턴의 책에서도 드물지만 일시적으로 퇴보하는 영혼들도 있는데 몇 생에 걸쳐 다시 의식수준을 회복하고 계속 앞으로 정진한다고 합니다.

 

전생을 아는 것보다 현생의 자신을 이해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전생을 아는 게 도움이 될 수는 있어도 현생에 충실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고 지나간 과거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적체험이나 영계의 기억이 없기 때문에 영혼과 사후세계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이곳은 체험을 위한 가상현실일 뿐이고 실제 세상은 우주 저 너머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번 생을 마치고 자신이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면 모든 기억들을 다 회복해서 영적인 가족이나 스승, 친구영혼들도 모두 알아보고 만날 수 있으니 죽음에 대해 걱정하지 마시고 행복하고 영적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사셨으면 합니다.

긴 글 읽어주신 모든 영혼들에게 감사합니다.

임사체험자들이 많이 겪게 되는 현상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생회고를 하는 것인데요.

모든 순간들마다 느꼈던 감정들을 생생하게 다 느낄 수 있다고 하고 자신이 살았던 삶을 스스로 평가하면서 후회나 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끔 자신의 삶이 정말 아름다워 보인다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 말은 별로 와 닿지도 않고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정말 이해하기가 힘든 말인데요.

고차원에서 인간세상을 보면 어떻게 보이는지와 무엇을 보고 아름다워 보인다고 하는 것인지 저의 영적체험들을 토대로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가끔 살면서 생과 사를 오가는 급박한 순간이나 죽기직전에 순간적으로 자신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건 제가 직접 경험을 해보아서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군에 입대해서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하루는 너무 육체적으로 힘들다보니 조금만 더 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순간에 제 눈앞에 저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더군요.

20초정도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저의 어릴 적 모습과 성장하면서 경험했던 주요사건들이 홀로그램처럼 보였습니다.

그때는 영성이 뭔지도 몰랐었고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고 정신이 없어서 그냥 ‘뭐지?’하고 지나갔었는데 나이가 들고 영성을 알아가고 영적체험들을 많이 하면서 그게 뭐였는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경험했던 것은 임사체험자들이 많이 경험하는 인생회고를 하는 장면과 비슷한 것인데요.

임사체험자들은 영혼이 육체에서 거의 죽지 않을 정도로 분리된 상태이지만 저는 현실의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육체가 극한상황에 내몰리다보니 순간적으로 영혼이 잠시 분리된 것이고 그 때 의식이 고차원에서 인생회고를 경험한 것입니다.

SF영화를 보면 홀로그램으로 된 3D입체영상을 보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요.

제가 파노라마 같은 저의 삶을 보았다고 한 것은 그냥 상상을 한 것이 아니고 영화에서처럼 눈앞에 입체영상들이 지나가면서 보였습니다.

실제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과는 많이 다른 느낌인데 세월이 흘러 유체이탈을 하게 되면서 그게 영혼이 영안으로 본 것과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임사체험자들이 말한 것처럼 사소한 일들보다는 인생의 주요장면들이 보이더군요.

부정적인 일들은 거의 보이지가 않았고 주로 재밌거나 행복함을 느끼거나 사랑을 느끼는 장면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20초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때 저는 그 상황 상황들마다 저의 감정을 다 느낄 수 있었는데 그 때의 순수함과 애틋함에 그리움이 많이 느껴지더군요.

그 때는 마치 몸과 정신이 따로 논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육체는 죽을 만큼 힘든 상황이지만 정신은 저의 삶을 보면서 신기해하고 희열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 때 살면서 처음으로 몸과 정신은 본래 서로 독립적인 것 일거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나중에 유체이탈을 하기 시작하면서는 홀로그램뿐만 아니라 그 과거의 현장을 직접 방문을 하기도 했는데요.

고차원 유체이탈이 잘 된 상태에서는 시간대를 마음대로 오갈 수가 있는데 과거의 어떠한 장소로 들어가서 현실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교실에 앉아서 수업을 듣고 있는 저의 모습을 보기도 했고 운동회를 하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재밌게 놀고 있는 저의 모습을 본적도 있었습니다.

그 때 그 느낌은 현실의식과는 정말 다른데 물질체험을 하고 있는 저를 고차원에서 보고 있으면 정말 귀엽고 아름답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리고 제가 아기 때 어머니가 저를 달래고 재워주는 것을 본적도 있는데 사소한 일상이지만 어머니의 모성애가 너무 크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고 별로 화려하지도 않는 좁은 방이지만 전혀 부족할 것이 없었고 그 방에서는 사랑의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가끔은 유체이탈을 한 상태에서 자고 있는 저의 몸을 볼 때도 있는데 처음에는 좀 당황했었지만 나중에 계속 보다보니 피곤에 지쳐서 자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물질계에서 하루하루를 나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애틋해 보이기도 하고 대견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래서 저는 가끔 몸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 따뜻하게 안아주기도 합니다.

아마 상위자아가 물질체험을 하고 있는 자신의 분신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합니다.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고차원에서 물질계를 보면 정말 신기하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팔다리를 가지고 지구 땅에 붙어서 아기자기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힘들겠다는 생각보다 재밌겠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게 됩니다.

유체이탈을 해서 가볼 수 있는 차원은 정말 다양한데 가끔 현실의 모습이 애니메이션에 가깝게 보이는 차원이 있습니다.

지구언어로 표현하기가 정말 어려운 부분인데 애니메이션에 가까운 실사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한번은 그 차원에 있을 때 어떤 호수가 있는 공원에 가 본적이 있었는데 연인들이 배를 빌려서 호수에서 노를 저으며 데이트를 하는 것을 본적이 있는데요.

제가 그 때 정말 깜짝 놀랐었습니다.

저도 인간으로 살아갈 때 그렇게 했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 모습이 눈물이 나올 만큼 아름답다고 느껴지더군요.

영혼상태에서의 감수성은 고차원일수록 상상을 초월합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장면이어서 최대한 의식을 집중해서 오래 머물다가 돌아왔었습니다.

현실에서 그런 사소한 데이트 장면들이 그렇게 사랑이 가득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몰랐다는 게 후회가 되더군요.

한번은 조카의 생일파티 현장을 방문한 적도 있었는데 정말 행복해 보였고 가족들의 엄청난 사랑과 축복이 느껴졌습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그런 축하를 받는 상황이 기분이 좀 좋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지만 고차원에서 그런 행복한 광경들을 보면 엄청난 감동이 느껴지는데요.

축복의 에너지가 영혼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게 눈에 보이기도 하고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말로 표현하기가 정말 힘든 부분인데 제가 여러 번 설명했듯이 고차원에서 영혼은 상당히 깊고 순수한 감정이 느껴지기 때문에 에고적인 관점과는 그 깊이와 크기가 많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살다보면 그런 행복하고 감동적인 순간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거나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을 구하기도 하면서 감사와 보람을 느끼기도 하는데요.

그러한 순간들이 바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사랑과 신성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들입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의 영혼 속에 간직된 사랑과 신성을 느끼고 고진동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으며 신성을 물질계에 표현하고 확장시켜서 영적성장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고가 너무 크거나 일상에 지치다보니 알아채지 못하기도 하고 다른 곳만 바라보다가 그냥 지나치게 됩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행복하고 가치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은 화려함으로 장식된 형식적인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걸 얼마나 잘 발견하고 얼마나 그 순간에 ‘현존’할 수 있느냐가 문제겠지요.

지구는 다른 외계행성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하고 아름다운 환경들이 많이 존재하는데요.

영계와는 다른 물리법칙들도 그렇고 동화 속 세상에서 내가 인간의 몸을 입고 체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 재밌기도 하고 나의 영혼에게 상당히 유의미한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다가 만약에 내가 그 영화 속으로 들어가서 주인공이 되어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보면 이해가 쉬울지도 모르겠네요.

인간으로 살다보면 때로는 슬프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하는데요.

우리는 온갖 희노애락을 다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데 힘든 순간들도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영혼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그 모든 경험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는 소중한 것들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인간으로 살아보지 않으면 슬픈 게 뭔지도 모르고 행복한 게 뭔지도 알 길이 없습니다.

영계에서 다른 영혼들에게 이야기를 듣거나 책으로 그런 느낌이 무엇인지 배울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경험을 하지 않고는 깊게 이해하고 공감하기는 힘들 겁니다.

마치 사과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영혼이 사과 맛을 지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는데요.

불쌍한 사람들을 보아야 불행이 뭔지도 알게 되고 연민의 감정이란 게 무엇인지도 알 수 있으며 도와주고 싶다는 이타심이 생길수가 있습니다.

이별을 해봐야 빈자리의 소중함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고 있을 때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가짐도 가질 수가 있겠지요.

화가 나는 상황을 경험해보면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역지사지’의 마음이 생길 수가 있고 화를 절제하려는 노력도 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이해해보려는 노력도 할 수가 있고 자비와 용서가 무엇인지도 알 수가 있을 겁니다.

가난해서 가끔씩 밥을 굶어보면 밥 한 그릇의 소중함을 알 수 있고 농부들의 피와 땀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알 수 있으며 돈을 벌어서 자식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차려주시는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영계에서 먹을 필요도 없고 부족할 것이 없이 사는 환경에서는 이런 것들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불행이 무엇인지 알아야 행복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으며 어둠이 무엇인지 알아야 빛을 이해할 수 있고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여기 물질계는 무엇 하나 이루려고 하면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고 꿈을 이루고 나면 엄청난 성취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힘든 노동을 하고 나서 마시는 막걸리 한잔의 시원함, 그리고 힘들게 일하고 받은 월급으로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소소한 기쁨과 행복은 인간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원하는 게 있을 때 생각만 하면 뚝딱하고 만들어지는 영계에서는 그런 인내심을 기르거나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겠지요.

물질계는 영계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이 열악하고 불편하고 한정된 자원으로 인해 경쟁이 치열하고 살아내기가 만만치 않은 혹독한 환경인 것은 분명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물질계에서만 느끼고 얻을 수 있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체험을 마치고 영계로 돌아가면 경험 자체보다는 그러한 소중한 것들을 하나라도 더 배우고 조금이라도 더 성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인생은 고통이라는 말도 있고 축복이라는 말도 있는데 사실 그건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인데요.

육체라는 무거운 옷을 입고 매일 먹고 살 걱정하면서 생존경쟁을 해야 하고 때로는 끔찍한 일들도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으면 인생은 고통이라는 말도 사실은 틀린 말이 아니긴 합니다.

임사체험자들이 삶은 축복이고 선물이며 영혼의 완성을 위해 윤회의 가지들이 다중우주로 뻗어나가는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에고가 없는 상태에서 삶을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데요.

삶의 세세한 부분들을 살펴보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들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삶 전체를 한 번에 보게 되면 한편의 아름다운 영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작품성이 있는 영화를 보면서 세세한 부분까지 살펴보면 주인공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을 많이 마주하게 되지만 우리는 그걸 보고 큰 감동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데 그런 힘든 순간들이 없었다면 그런 감동을 느낄 수가 없을 겁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1시간정도 되는 분량의 영화로 축약해서 만든다고 가정했을 때 그걸 보면 어떤 느낌이 들지 상상을 해보면 조금은 이해가 될 수도 있겠네요.

자신의 영혼이 성장하려면 반드시 경험하고 느껴야하는 일들이 있는데 그 순간에는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런 일들이 퍼즐이 맞추어지듯 하나둘씩 모여서 자신이 발전하는데 단계적인 밑거름이 되어가고 자신이 성장해가는 것을 보면 정말 아름답고 경이롭다는 생각까지 들게 될 겁니다.

악하게 살지 않는 평범한 영혼들에게는 사후에 인생회고를 할 때 대부분 그렇게 보일 겁니다.

임사체험자들의 인간의 삶에 대한 관점은 전체적이고 전지적인 시점에서 본 것이며 영혼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가고자 하는 지향점을 보는 것입니다.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걸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이해하기 힘들뿐이지요.

“이 세상은 한 편의 아름다운 책이다. 그러나 그 책을 읽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우리는 이 땅에 오기 전에 영계에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계획하고 준비한 아름다운 책을 누구나 마음속에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책속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이해하려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영적으로 볼 때 많은 차이가 나겠지요.

그리고 ‘신성’이라는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판도 가지고 태어나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 들리는 나침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영혼이 의도한 삶의 아름다움을 찾고자 노력한다면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신 모든 영혼들에게 감사합니다.

아래 영상은 허각이 부른 ‘마지막으로 안아도 될까’라는 노래인데 제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뮤직비디오를 정말 잘 만들었는데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더군요.

5분 정도 되는 분량에 한 사람의 인생이 모두 담겨있는데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 살면서 느끼는 설레임, 사랑, 희망, 행복, 슬픔, 질병, 절망, 아쉬움, 고난, 후회 등의 모든 감정들이 다 담겨있습니다.

위에서도 제가 설명했듯이 사람은 살면서 고통, 슬픔, 역경, 괴로움 등 힘든 순간들을 많이 겪게 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짧은 영상으로 압축해서 보게 되면 그 속에 사랑, 행복, 헌신, 희생, 연민, 용서, 성장 등의 아름다움이 많이 숨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평범해 보이는 삶이지만 그러한 삶에서도 영혼이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참 인상적인데요.

마지막에 다시 젊은 모습으로 돌아가 행복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이걸 볼 때마다 사후에 영계로 돌아가 다시 행복하게 지낸다는 느낌이 많이 들더군요.

영계에서는 젊은 모습으로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는 영상이니 꼭 한번 보셨으면 합니다.

 

https://youtu.be/fCAF9rkZGdw

 

그리고 아래 영상은 ‘라푼젤’이라는 애니메이션의 OST인 "I see the light"라는 노래인데요.

다른 차원의 느낌을 현실세계에서 표현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제가 유체이탈을 해서 연인들이 배를 타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한 것과 느낌이 정말 비슷합니다.

그럼 즐감하시고 좋은 하루 되셨으면 합니다^^

 

https://youtu.be/q64p9bjL0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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